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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연대기

마라티즈 게임 연대기 3편 : 넥슨은 다람쥐를 뿌려라

by 마라티즈 2025. 4. 23.
 

 


(권장 BGM)
(작곡가 황주은님 감사합니다)



때는 격동의 2000년대 초 가을.
이레귤러 헌터이자 포켓몬 트레이너인 저는
오늘도 록맨을 좀 해 볼까~ 하는 마음으로 컴퓨터를 찾았습니다. 

컴퓨터 앞에는 간만에 아빠가 앉아 계셨습니다.
일 하시나보다~ 했는데
뭔가 딸깍 딸깍, 잘그락 잘그락 하는 소리가 들렸죠.

"15분만 기다려.
"

바둑이었습니다.



종종 기원에도 놀러 가시며 심야 바둑 방송의 애청자셨던
아빠가 바둑을 두시는건 평범한 일이었지만
컴퓨터로는 처음이었습니다.

아빠가 하얀 돌을 놓으면, 상대도 검은 돌을 놨어요.
아빠가 고민 끝에 돌을 놓으면,
상대 역시 고민하는 듯 시간을 질질 끌다 돌을 놓았습니다.
마치 아빠 앞에 투명인간이 있는 것 같았죠.

그렇게 잠시 후.
아빠는 실수라도 하신 듯, 아쉽게 혀를 끌끌 차시곤
대국을 종료하고 자리를 비켜주셨습니다.
 
저는 아주 당황스러웠어요.
"대체 바둑을 누구랑 두는 거야!?"


바로 그 대국이 저희 집에도 찾아온 인터넷 시대의 서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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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티즈 게임 연대기
제 3편

원작은 만화가 김진(1960) 님의 순정만화입니다



바람의 나라
The Kingdom of the Winds

.
.
.
많은 분들이 익히 알고 계실 넥슨의 바람의 나라는
1996년에 서비스를 시작하여 현재 29주년인 초장수 온라인 게임이며
저의 첫 "온라인" 게임입니다.

 


지금과 달리, 제가 게임을 처음 접했을 시절(격동의 2천년대 초)에는
 인터넷이 막 발달하던 시기였고
때문에 게임 시장은 멀티플레이어와 싱글플레이어 기반 게임으로 크게 나뉘어 있었습니다.
어떤 싱글플레이어 게임들은 거치기의 2P 컨트롤러나 유선 케이블을 통해 멀티플레이를 지원했지만
 "같은 장소에 있어야 함" 이라는 절대적인 조건이 필요했어요.
그런 만큼 게임의 진행 또한 기본적으로 게임 세상과 나와의 싸움이었죠.


인터넷을 활용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던" 시기다보니
정보를 얻는 것 또한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지금처럼 위키는 물론, 유튜브 등 커뮤니티를 통해 쉽게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어요.
수단이라고는 게임 공식 사이트의 커뮤니티와 게임 잡지나 가이드북 같은게 전부였고 
어쩌다 같은 게임을 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죠.

이런 잡지라도 발견하면 그 시절 말로 "땡 잡은" 겁니다


두 요인이 맞물려
멀티플레이어 게임의 대표주자이며 우리나라의 전통 놀이(?)인 "스타크래프트"조차도
저처럼 정보가 제한된 꼬마들은 배틀 넷을 통해 다른 게이머와 놀 수 있다는 사실을 영영 모른 채,
캠페인만 클리어하고 치우던 시절이었던 겁니다.
show me the money


...그러한 시대에 같은 게임을 플레이 한다는 것.
이것은 그야말로 세대와 성별을 초월하는 공감대였던 겁니다.
그리고 제게도 옆자리에 앉은 아이로부터 그 운명적인 질문이 오고야 말았죠.

"너 게임 뭐 해?"

굉장히 기다리던 질문이었습니다.
포켓몬과 록맨에 대한 일장연설을 읊을 준비가 되어있었죠.
하지만 짝꿍은 제게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난 바람ㅋ"


지금 듣고 계시는 브금이 바로 이 화면의 그것입니다

 


...바람?
wind?
그 아이의 시크하고 무심한 듯한 태도.
그게 대체 무슨 게임이냐고 묻자,
"학교 끝나고 우리 집에 가서 볼래?" 라고 하는 당돌함까지.
좋습니다.
가 주는 것이 예의겠지요.

그리고 방과 후 그 아이가 당당하게 켠 것은
오밀조밀하고, 예쁘고 따듯한 동양풍.
포켓몬 같은 시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뭔가 조금은 답답한 진행속도를 가지고 있는 게임이었죠.

친구는 당연한 발걸음으로 어딘가 어두컴컴한 곳에 들어가더니,
쥐들을 퍽퍽 때려잡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쥐굴. 초보 유저들의 핫플레이스였죠.

 

박쥐는 싹 거르고 묵묵히 쥐만 10분 째 잡는 친구.
아주머니가 주신 과자를 뽀시락대며 보기엔 적당했으나,
그렇게 당당하게 굴 정도로 재미있는 게임 같지는 않았죠.

문제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친구가 패던 쥐를 지나가던 스님(?)이 번개를 떨어뜨려 잡아버린 거죠.
그것도 한 방에!
친구는 13대는 쳐야 했는데!

바람의 나라의 공격마법. 1시부터 시계방향으로 주작의 화염주, 현무의 자무주, 백호의 백열주, 청룡의 뢰진주의 강화 버전.


"아, 스틸 하네!"
"저 빡빡이도 적이야? 잡아!"
"아니, 가라고 해야지."

가라고 한다라?
그건 사람한테나 통하는 말이 아닌가?

그리고 정말 친구는 그 스님에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습니다.
"스틸 즐"
그리고 돌아오는 대답.
"凸"

이것이 욕설이라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었고,
친구와 빡빡이는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나쁜강냉이"
"매우 이런아"
"아이심하네"


(좀 귀엽게 싸운다 싶었지만 게임 안에 욕설을 필터링하는 기능이 있었습니다)

결국 친구는 분을 못 참고 게임을 꺼 버렸죠.
이것저것 떠들다가 붕 떠버린 분위기에 저는 집에 가게 되었지만,
돌아가는 길은 전례 없는 흥분으로 떨렸습니다.
게임 속의 사람과 말싸움을 하는 그 광경에 압도당한 저는 엄청난 쇼크를 받았거든요.


그렇습니다.
바람의 나라는 우리 나라 최초의 MMORPG였던 겁니다.

솔직히 지금 봐도 캐릭터가 귀엽습니다


MMORPG
Massively Mutiplayer Online Role-Playing Game
대규모 다중 사용자 온라인 역할 놀이 게임

1. 온라인 세계에서
2. 자신이면서도 자신이 아닌 어떤 존재가 되어
3. 그런 사람들과 부대끼며
4. 무언가를 해 나가는 게임

여태 지나쳐 온 전봇대를 든 철수, 부채를 든 삐삐머리, 내복만 딸랑 걸친 아저씨도
전부 어디선가 이 친구처럼 게임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학교에선 조용하고 얌전한 제 짝꿍은
바람의 나라의 세계 안에서는
 
목검과 방패를 들고, 비늘 갑옷을 걸친 전사였던 거에요.


지금이야 이게 뭐 별건가 싶지만,
당시엔 아주 신선한 개념이었습니다.
게임 안의 캐릭터가
이미 서사와 형태가 전부 정해진 특정 인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개념 자체가 굉장히 두근거리는 것이었어요.

플레이 스타일인 직업에 캐릭터의 생김새나 이름, 심지어는 배경설정까지.
전부 플레이어의 의도 대로 만들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분명 같은 전사지만
"멋진 수염을 기른 터프가이"부터 "땋은 머리의 아름다운 여검객" 까지 나뉜다는 거죠.

즉 주인공을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주인공이 되는 거죠.



제 첫 신수는 현무. 극진자천무주!



이런 개념은 세계적인 히트를 쳤고, 
블리자드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2004)는 지금도 현역인 게임계의 살아있는 전설입니다.
물론 리니지(1998),메이플스토리(2003), 아이온(2008), 로스트아크(2018)를 비롯한
 상당수의 유명 국산 게임도 이에 근간을 두고 있죠.

그리고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한 세계의 주민이 되는 것.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제가 참을 수 없는 포인트였어요.
상상 속 세계의 인물이 될 수 있다는 것 말이죠.

설레는 마음으로 집에 도착하자마자 바람의 나라를 설치한 저는
엄선하고 엄선한 끝에 저의 분신이 되어 줄 귀여운(?) 만두머리를 만들었습니다.
직업은 마법 딜러인 주술사.
왜냐면 번개 한 방에 몹을 스틸하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깐지나 보였기 때문에;;
(정작 제가 고른 마법은 얼음 마법이었습니다)

클래식 바람 스샷


(대충 이렇게 생겼는데 몇년 오래오래 키워서 이것보단 화려했어요)
그리고 그것을 계기로 바람의 나라를 3년 정도 했고,
그 안에서 굉장히 많은 일들을 겪었습니다.

신기한건 이러면 진짜로 다람쥐가 나왔다는거임



삼삼오오 모여 초보자 사냥터에서 다람쥐 젠을 넥슨에게 요구하던 순진한 추억으로 시작하여,
같이 도우며 웃고, 슬픔에 울고, 불합리에 화내고
온갖 사기를 다 당해서 2주일간 열심히 모은 돈으로 산 웨딩을 한방에 날려먹는 경험도 하는 등
미래의 경제교육까지 알차게 받았습니다

이 기회에 목 놓아 힘껏 외쳐 보겠습니다

나름 고가의 룩템인 번호웨딩


5:5 가르마 파랑머리 전사 놈아 정말 고맙다
길고 고통스럽게 유병장수해라

.
.
.
그 이후로도 저는 MMORPG에서 살아갈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메이플스토리,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길드워 2, 파이널 판타지 14 등등
 숱한 세계를 구한 영웅이라는 자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배운 것은 새로운 세상을 알아가는 모험심 뿐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모험을 거듭하며 모니터 뒤에는 실제 사람이 있다는 것과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낭만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낭만을 존중하면서 제 낭만도 인정받는 법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건 바로 상호 존중이라는 자세였죠.

중간의 당당한 C8. 야만과 낭만은 한끗차이... 지만 세상에 욕 한번 안하는 사람 어딨겠나요



MMORPG는 한 세계를 놀이터 삼아 사람들이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게임입니다.
현실과 가장 닮은 게임이라고 할 수 있죠.
그냥 이게 진짜 메타버스였다고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는 다수의 힘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혼자서 못 할 일을 여럿이선 해낼 수 있고,
마음이 일치하는 사람끼리라면 무덤까지도 같이 갈 수 있죠.
타인과의 상호작용이 낳는 혼돈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자극 중 하나입니다.


그렇습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의 낭만이 맞물릴 때,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할 때...

 

 

 

 



MMORPG는 세상에서 가장 큰 파괴력을 지닌 게임이 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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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처음 바람의 나라를 시작할 때,
 GM이 유저에게 신신당부하듯 말해주는 팁이 있었습니다.

"게임 속의 아바타는 또 다른 자기 자신입니다."

저는 이 말을 지금까지도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데요,




여러분은 게임 속에서 어떤 사람으로 살고 계신가요?








저라는 사람이 한 사람의 게이머로 거듭나는 데 정말 큰 도움 주신
바람의나라 가이드북 저자 중 한 분이신
"홍랑" 님과
게임 만화라는 즐거움을 알려주신
조랑이의 바람일기 작가분인
"원사운드"
님,

그리고 긴 글 읽어주신 방문자 여러분께
정말 감사합니다!

( _ _ )







다음편 예고




파멸적!

 




마라티즈 게임 연대기 4편 : 덱스 5 법사는 망캐임 접으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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